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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호미곶 한민족 해맞이 축전 덧글 0 | 조회 3,265 | 2011-12-01 00:00:00
관리자  













호미곶해맞이축전


 



등대박물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南區) 대보면(大甫面)에 있는 한국 최초의 등대 박물관.  

 


1985 년 2월 7일, 대지 344㎡. 건축면적 112㎡ 규모로 문을 연 등대박물관은

 


한국 등대의 발달사와 각종 해운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박물관으로,

 


등대 관련자료 및 소장품 71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1982년 8월 4일, 국내 최대 규모의 유인등대인 장기갑(호미곶)등대(높이 26.4m)가

 


지방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됐다.

 


 


영일군은 당시 장기갑 등대의 지방 기념물 지정을 계기로 등대와 관련한

 


각종 자료를 전시할수 있는 건물을 짓고, 포항 지방해운항만청을 통해서 자료를 수집했다.

 


 


현재 박물관 전시장 1층에는 등대의 유래와 역사, 각종 항로표지 등이 전시돼 있다.

 


2층에는 항만청 초창기 부터 각종 자료가 발행 순서별로 진열돼 있다.

 


전시장 벽에는 외국의 유명한 등대 사진이 전시돼 있다.

 


 





등대

등대박물관




찾아오는 길


- 고속도로 → 포항 → 구룡포(30분 소요) → 대보 장기곶(20분소요)

 


- 포항시내 →좌석버스(200,200-1번)이용 →구룡포 →

 


대보행시내버스 (구룡포에서 대보까지 20분 소요)

 




 


풍력발전기



경북 포항시 대보면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한 해맞이광장의 한 켠에


장엄하고 육중한 자태를 뽐내는 듯 유유히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임곡방면 언덕위에서 내려다 보는 대보면 전경은


풍력발전기와 조화를 이루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구룡포방면에서 오다보면 대보면의 온갖 재앙이라도 물리칠 듯


우뚝 서 있는 풍력발전기를 만날수 있다.

 


마치 마을의 수호신 처럼 버티고 서 있는 풍력발전기는


한반도 최남단의 거센 바람따라 오늘도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다.




 



풍력발전기



풍력발전이란?



대체 에너지로서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는 풍력발전시스템은


대기중에 폐열과 공해물질을 방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이 없는


청정 무공해 에너지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경제성이 높은 수평축 대형풍차 (300KW, 500K W, 1MW급이상)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선진국들은 이미 상용화 단계까지 기술을 축적,


국가적인 지원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부존자원이 부족해 매년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수입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해안가와 산악지역, 그리고 방파제 등을 활용한 풍력발전을 통해서


에너지 자급도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풍력발전을 통한 무공해 천연 에너지 생산은 황과 질소산화물은 9g/㎾h,


중금속류 0.1g/㎾h, 이산화탄소는 0.5∼1.0kg/㎾h, 입자물질은 200g/㎾h 등


공해물질을 크게 줄여 깨끗한 환경 보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풍력단지 면적중 실제 이용되는 면적은 전체면적의 1%~2%에 불과해,


나머지 98%~99%는 다른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


 


국토가 비좁은 우리나라의 경우 황무지나 방파제 등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국토 이용의 효율화를 꾀할 수 있다.


 


환경친화적인 풍력발전시스템은 관광자원으로서도 가치가 높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의 내륙 및 해상지역에 있는 대규모 풍력단지는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풍력발전은 기후 환경협약(GR)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확대 개발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출처 : 국내외 풍력발전기의 기술 개발 및 보급 현황, 손충열 인하대학교 산업과학기술연구소장 )




 


 


연오랑세오녀



연오랑세오녀상은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 우뚝 솟아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호미곶 마을을 상징하고 있다.

 


해와 달을 소재로한 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해가 뜨는 호랑이 마을´로


일컬어지는 호미곶마을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


 


높이 8m로 청동을 이용해서 조각한 연오랑과 세오녀상은


두 사람이 정답게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중심으로,


조각상 좌대는 두사람을 일본에 싣고 간 바위를 암시하고 있다.


 


또 바닥 조형물은 영일만과 동해의 물결(파도)을 상징하고 있다.


 


원형의 둥근 조형물은 이 땅을 밝게 비추는 해와 달을 상징하며,


원형 조형물 중앙의 검은 부분은 일본에 전파한 선진문물인 비단을 의미하고 있다.


비단은 특히 일월정을 상징하는 국가제천행사의 제물이다.

 




연오랑세오녀연오랑세오녀 앞모습연오랑세오녀 뒷모습



연오랑세오녀 설화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즉위4년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부부로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가서 해조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바위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 하여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겨 이리저리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세오를 왕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정기를 잃어 빛이 없어지니,


일관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 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가버린 연오랑 세오녀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 났다"고 했다.


 


이에 왕은 사자(使者)를 일본으로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아 오도록 했으나


연오는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필시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왕비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 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예전과 같이 빛을 찾을 것"이라면서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使者)가 돌아와서 아뢴후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그전과 같이 돌아왔다.

이후 그 비단은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며,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했다.


지금도 매년 포항문화원에서 일월신제(日月神祭)를 올리고 있다.


 


 



강사리지석묘



동해바다가 바라보이는 조그마한 포구인 대보면 강사1리 229번지에는


높이 3M, 둘레 8미터 정도의 바위(돌)가 있다.

 


강사3리, 속칭 명월이란 마을에도 이와 비슷한 바위(돌)가 있다.


이 바위들은 예부터 신령스럽게 생각해 왔으며 아직도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옛날 금강산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하늘의 한 여장사(여신)가 커다란 바위를 하나는 머리에 이고,


또 하나는 치마에 싸서 금강산으로 운반하던 중이었는데


금강산으로 부터 바위가 필요없다는 전갈을 받고


가지고 가던 바위를 이 곳에다 그냥 버렸다고 한다.


 


이 바위들은 고인돌로 판명이 되었으며 지금도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강사리지석묘 사진



지석묘(고인돌)의 유래



청동기시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고인돌은 시대적으로


북방식이 앞선다는 설과 남방식이 앞선다는 설이 있으나,


시간적 관계 판단에 필요한 유물이 워낙 미미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단언하기 힘들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점에 대해서도 아직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혹자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치를 근거로 신석기시대에 이미 고인돌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기원전 8,7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거나,


아무리 이르게 보아도 기원전 5세기를 넘을 수 없다는 주장 등을 하여 이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고인돌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움무덤[土壙墓]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문화적 연원에 대해서도 역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지하에 설치된 돌널무덤[石棺墓]이 지상화되어 고인돌로 발전하였다는 자생설,


만주지방에 분포한 대석붕(大石棚)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다는 설,


남아시아의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유입으로 발생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 황해도 ·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 곳에 수백 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어 분포한 경우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전북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한편,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일본 규슈[九州]지방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죠몽(繩文)시대 말기에서


야요이(邇生)시대 초기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한국계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어,


일본 야요이문화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


 


고인돌에서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민무늬토기와 붉은간그릇 등 토기류와 청동기가 부장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고인돌에서는 유물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


고인돌이 세골장(洗骨葬) 혹은 이차장(二次葬)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또한 고인돌 축조에 필요한 거대한 돌의 운반에는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로 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것이 족장(族長) 등


지배계급들의 묘(墓)라는 주장도 있다.(출처: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상생의 손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축하하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99년 6월 제작에 착수한지 6개월만인 그해12월에 완공됐다.


 


상생의 손은 국가행사인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인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인


상생의 손은 두 손이 상생(상극의 반대)을 의미한다.




성화대의 화반은 해의 이미지이며, 두 개의 원형고리는 화합을 의미한다.


상생의 두손은 새천년을 맞아 화해와 상쇄의 기념정신을 담고 있다.

 


재질은 청동과 화강암이고, 성화대(15m*20m)와 함께


오른손(H8m*L4m*W4m)과 왼손(H3m*L6m*W4m)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 특이하다.

 







상생의손 사진1



상생의손 사진2

 




 


호미곶청포도비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 ´청포도´로 유명한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의 시비(詩碑)가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호미곶에 우뚝 서 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호미곶과 가까운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원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려 청포도를 지었다고 한다.


 


시비는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 크기로 육사를 기리는 비문과 청포도 시가 새겨져 있고.


시비 조형물 디자인은 영남대 홍성문 교수, 비문은 아동문학가 손춘익씨,


글씨는 서예가 정현식씨가 각각 맡았다.







호미곶청포도비사진



작품감상



육사는 이 시를 통해서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을 노래했다.


청포도라는 소재의 신선한 감각과 선명한 색채 영상들이 잘 어울려서


작품 전체에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준다.


 


특히 식민지 치하의 억압된 현실은 시인이 꿈꾸는 현실과 대립하면서,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극복 의지가 담겨 있다.


 


청포도,하늘,푸른바다,청포 등 청색 이미지와 흰 돛단배,은쟁반,하이얀 모시수건 등


흰색 이미지는 이상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상징적인 소재이다.


 


풍요로운 고향에 대한 정겨운 정서가 듬뿍 담긴 ´청포도´는 전설이 풍성하게 연결된 매체로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를 담고 있다.


 


또 ´그가 찾아올 그 날´이란 대목은 억눌린 소망이 밝은 빛 아래 펼쳐지는 때를 의미하며,


´청포입은 손님´은 어두운 역사 가운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를 암시하고 있다.


´은쟁반´은 화해로운 미래 삶을 향한 순결한 소망을 암시하고 있다.

 




청포도(靑葡萄)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및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